일요서울

정의의 회색지대에서 [2]

< 지난호에 이어서 >

피해자를 대리하면서 필자가 의외로 자주 들었던 말은 바로 “제 이야기를 믿어 달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많은 사건을 경험하면서 형사재판은 단순히 유무죄를 가리고 형량을 정하는 절차를 넘어서서, 그것은 누군가가 입은 상처와 고통이 법규 안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승인받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김태경이 말하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단순히 분노를 지속할 권리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충분히 애도하고 해석할 시간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에 가깝다고 해석되어 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피해자의 권리와 베카리아가 강조한 형벌권의 절제가 현실의 법정에서 종종 충돌한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측면에서 보면 국가의 처벌은 언제나 부족하게 느껴진다. 반면 피고인의 측면에서 보면 형벌 자체를 넘어 사회적 낙인과 비난이 사실상 또 하나의 처벌로 기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형사전문변호사인 필자는 바로 그 충돌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피해자를 대리하는 날에는 처벌의 무게가 지나치게 가볍게 느껴지고, 피고인을 변호하는 날에는 사회가 한 인간을 영원히 범죄자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실제로 법정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은 대중이 상상하는 것처럼 언제나 선하거나 언제나 악한 존재가 아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엄벌주의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피고인의 성장 과정과 가족사, 범행에 이르게 된 복잡한 경위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을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절감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사정이 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범죄를 용인하는 태도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정의를 하나의 결론이나 정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란 서로 충돌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에 가깝다고 믿는다. 피해자의 존엄과 가해자의 권리, 사회의 안전과 인간의 회복 가능성, 응보와 관용이라는 가치들은 어느 하나만 선택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베카리아가 국가 권력의 절제를 말한 이유는 범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복수의 감정에 사로잡히는 순간 법치주의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김태경이 피해자의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강조한 이유는, 피해자의 고통을 사회가 성급하게 봉합하려 할 때 또 다른 폭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문제의식은 출발점은 달라도 결국 같은 그곳을 향하고 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정의란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침묵시키는 방식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법률가의 역할은 그 질문들에 성급한 답을 내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목소리들이 적어도 공정하게 들릴 수 있는 절차를 지켜내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정의는 결코 흑백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정의는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 처벌과 관용, 분노와 절제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에서 가장 치열하게 시험받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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