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회색지대에서 [1]
필자는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집 앞 도서관을 찾는다. 평소에는 동행인이 있기에 빨리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소설을 집어 들곤 하지만,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어 인문학 서가를 둘러보았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그리고 읽고 싶었던 김태경의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꺼냈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며 필자는 오래전부터 마음 한편에 품고 있던 질문, 곧 정의의 회색지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로스쿨 재학 시절 필자는 한 가지 질문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모두가 비난하는 사람의 편에 서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변호사로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종종 필자에게 묻는다. “피해자 편입니까, 가해자 편입니까?”
형사 법정에서 변호사는 때로 피해자의 곁에 서서 법정으로 향하고, 때로는 악질적인 범행을 저지른 피고인의 옆자리에 앉는다. 어떤 날은 피해자의 울음을 듣고, 또 어떤 날은 피고인의 가족이 흘리는 눈물을 마주한다. 변호사는 판사처럼 옳고 그름을 가리거나 형벌의 경중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뢰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 싸우는 대리인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형사사건을 다루며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필자가 깨달은 것은 현실의 정의가 결코 흑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정의가 명확한 선과 악의 구분 위에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실제 법정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며 그 경계는 언제나 흐릿하다. 그리고 그 모호함 속에서 법은 끊임없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8세기에 쓰인 『범죄와 형벌』은 오늘날 읽어도 놀라울 만큼 현대적이다. 베카리아는 국가가 복수의 감정으로 범죄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형벌의 목적은 응징이 아니라 범죄의 예방에 있으며, 법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고문을 반대했고 사형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무엇보다 국가 형벌권의 절제를 강조했다. 필자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가해자를 변호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형사사법제도의 핵심은 죄를 지은 사람조차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에 있다. 모두가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적법절차는 보장되어야 한다. 사회적 분노가 아무리 크더라도 국가가 감정에 휘둘려 처벌하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 법치주의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베카리아가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범죄자를 사랑하자고 말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 아래 또 다른 폭력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법정 밖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김태경의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읽으며 필자를 수없이 얼굴이 화끈거리고 불편했다. 우리는 피해자에게 너무 쉽게 용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가해자의 변호인으로서,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변론하고, 수십 장의 반성문과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한다. 때로는 사건의 조속한 종결을 이유로 피해자에게 합의를 권유하거나, 합의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정작 피해자는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날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법정에서 재판은 몇 차례의 기일을 거쳐 종결되지만, 피해자에게 사건은 판결 선고와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 속에서 다른 형태로 계속되기 때문이다. <다음주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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